방탕함을 경계해라!는 스토이시즘의 전형이다. 하지만 스토이시즘은 이래서 안된다 저래서 안된다, 그저 논리로만 훈계한다. 루소는 다르다. 방탕함을 혐오감으로 잠재우라 한다. 감정을 감정으로 잠재운다니, <에밀>을 읽으며 그게 참 참신해서 적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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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 of Feb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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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 of Feb 2025
나는 그에게 사랑을 가르칠 것이다. 진정한 마음과 마음의 결합이 얼마나 우아한 매력을 낳는지 느끼게 해줌으로써 방탕함에 대한 혐오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사랑에 빠짐으로써 현명한 인간이 되게 할 것이다. 불타오르는 청년의 욕망을 이성의 권위로 통제하는 것은 참으로 옹졸한 일이다. <에밀, 장 자크 루소>
감정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다. 수억년을 이어온 아미그달라의 폭정에 수천년따리 전전두엽이 쿠데타를 일으킬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감정을 또다른 감정으로 맞바꿀 순 있다. 루소의 말대로, 욕정은 도덕적인 설교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 “방탕함에 대한 혐오감”으로, 진정한 사랑의 “우아한 매력”으로 맞바꿀 수는 있다.
정념은 정념의 힘을 통해서만 극복된다. 자연의 폭정을 끝내는 것은 언제나 그 자연이다. <에밀, 장 자크 루소>
그러니 동물적인 감정이 차오를 때 (욕정이든 분노든 귀찮음이든) 맞서 싸우면 안된다. An eye for an eye - 동물적 감정은 인간적인 감정 (우아함이든 행복감이든 뿌듯함이든)으로 맞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