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내 노트에 적었던, 인스타에 스토이시즘적으로 공유했던 글들을 하나씩 인터넷에 진열해보고 있다.
아래 글은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글을 계기로 ’영감이 차오르면 글은 알아서 써진다‘는 걸 깨달았고, 이 글을 기점으로 전시회에 재미를 붙였으며, 이 전시를 경험하며 Doing art for a reason이란 내 호오를 처음으로 발견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뜻깊은 글이다.
사려깊은 절충안
모든 걸 다보고 모든 걸 다 읽고 드는 생각 — 참 사려깊은 절충안이 돋보이는 전시인 것 같다.
태오티우이칸 거석도, 비를 위한 303점의 제물도, 제 5왕조 기자 석관도. 죽은자의 의도와 염원이 훼손된 채, 진품은 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하지만 작가는 “어서 원래대로 돌려놓아라!”며 쏘아붙이지 않는다. 죽은자를 위하면서도 박물관의 순기능을 이해한다.
하여 작가는 진품을 대변할 복제품을 만들고
가짜이기에 주어진 자유 속에서
작가 특유의 담백한 재치를 더해
넌지시 의문을 제기한다.
하여 작가는 내 키만한 액자를
흑연으로 까맣게 채워놓고선
우리에게 “두개의 별”과 “마스타바 풍경”이 보이느냐 묻는다.
“죽은자의 시선”을 켜켜이 쌓으며
그들에 대한 연민을 넌지시 제안한다.
죽은자에게도, 살아가는 자에게도
모두 사려깊은 절충안이다.
빛의 속도로
2nd of March 2024
작가의 다른 전시가 더 보고 싶었다. 그래서 리움 미술관에 갔다.
4층의 청자도, 3층의 분청사기도 겉핥기만하고
이 작품을 보기 위해 1층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큼지막한 액자 4개에 국보를 번호 순으로 나열한 <#국보530점 >이 전시돼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그림이다.
사진을 잘라서 붙인게 아니다.
아니... 이걸 다 그렸다고? 530개를?
일일히 색연필, 물감으로 그렸다.
그 노동집약적 정성에 감탄하며
약간의 경외심을 느끼며
디테일 하나하나
한참을 멍 때리며 쳐다보았다.
그런데 문득 발견한 패턴.
아래쪽만 유독 듬성듬성하다.
왜 그럴까?
해설을 본다.
아, 분단 이전과 이후구나.
이전엔 남북이 국보를 공유했지만
이후엔 남한의 국보만이 남은 것.
빈자리가 숙연해진다.
아울러 또다른 패턴이 보인다.
위쪽엔 (먼저 번호가 붙은 국보) 건축물이 많지만
아래쪽엔 (나중에 번호가 붙은 국보) 장신구나 도구가 많다.
왜 건축물에 먼저 번호가 붙었을까?
맨위에 있는 숭례문이 저 바닥에 있는
고려청자보다 더 가치있어 보인다.
문화재청은 번호는 중요도와 무관하다 일관하지만
기계적인 나열 속 패턴은 자연스레 의문을 자아낸다.
건축물은 반드시 배경을 그리고
유물은 배경을 그리지 않아
그 의문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시간이 많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그림은 말그대로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해야 된다는데
그래서 어렵다는데
갈라포라스김 작가는
그 어려운 걸 정성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참 잘 해내는 것 같다.